그날의 연합
넷째 날
성경말씀
바로 그날에 그대들이야말로 알게 될 겁니다. 내가 내 아버지 안에, 그대들이 내 안에, 내가 그대들 안에 있다는 것을요.(요한복음 14장 20절)
묵상
이어령 교수의 어느 글에 '강촌에 온갖 꽃이 먼 빛에 더욱 좋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강촌에 봄이 왔습니다.
강을 따라 온갖 꽃이 피어있습니다.
배를 타고 가니 강둑의 풍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먼 빛에 더욱 좋습니다.
누리며 바라보니 참 좋다는 것입니다.
강둑에 핀 꽃을 배를 타고 가면서 보는 눈과 꽃을 꺾어 다른 사람에게 팔기 위해 바라보는 눈은 전혀 다릅니다.
꽃을 통해 무엇인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이루려는 사람은 꽃의 모습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습니다.
욕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자기 목표를 이루려고 나무와 풀과 사물을 집중해서 노려볼 것입니다.
그러면 꽃, 나무, 풀, 사물은 자신의 욕구 때문에 그 모습이 가려져 버립니다.
물끄러미 아무 욕구 없이 바라보는 그 이면에는 존재를 꿰뚫는 통찰력이 들어있습니다.
이렇게 ‘관조의 시선’과 ‘파괴의 시선’은 다릅니다.
신앙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광야로 보내심으로써 우리가 존재로 살 것인지, 소유로 살 것인지를 선택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존재를 택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성공이 내 안에 있는 게 아닙니다.
이것을 잘 묵상해야 합니다.
나무꾼이 도끼를 들고 찍으려 하는 나무를 대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대한다면, 그 시선은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파괴적인 움직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욕망에 뿌리를 둔 장악욕과 아집, 인정 욕구와 두려움, 분노와 좌절감이 있을 때 이는 강력한 끌개가 되어 파괴의 시선으로 하나님을 찾아다니게 됩니다.
자기 뜻에 맞게 하나님을 재단하고 표적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렇게 자신이 찾아낸 하나님을 조각냅니다.
하나님을 자기 방식으로 붙잡아서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 내지 않을 때, 도끼를 들고 하나님을 찾아 헤매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게 오실 때 비로소 하나님을 온전히 볼 수 있는 관조의 시선은 가능해집니다.
스데반은 죽음을 앞에 두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을 보니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주시되”
스데반은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계심을 압니다.
그런 그에게 아브라함이 보입니다.
욥은 고난을 겪고 나서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광야에서 베일은 벗겨지고 마음의 눈은 맑아집니다.
소유의 비늘과 안개가 걷히고 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맑은 눈으로, 있는 그대로의 그분을 관조할 수 있습니다.
사막교부와 함께하는 묵상
우리가 육적인 동요의 포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관상觀想하는 것에서 우리 마음을 멀리하기 때문이다.- 테오나스
기도
주님,
당신은 오셨고 또 오시고 계십니다.
제 안에 계시고 또 밖에 계십니다.
이미 오신 당신을 존재의 맑은 눈으로 바라보게 하소서.